돛을 단 중국의 전통적인 범선

명나라 진위사 왕복도(往復道)

평안도 선천(宣川)의 철산( 山)

 평안도 선천 용천(龍川)




명나라 진위사 왕복도 ※적색 화살표 명나라 북경 가는길 표시 ※ 청색 화살표 귀환길 표시 진향사 이필형이 (1620년 11월~1621년 5월) 7개월 동안 쓴 조천일록을 토대로 구성 한 것입니다.



서울→평양(平壤)→평산(平山)→안주(安州)→정주(定州)→용천(龍川)→압록강(鴨綠江)→진강성(鎭江城)→탕참(湯站)→ 봉황성(鳳凰城)→진동보(鎭東堡)→통원보(通遠堡: 진이보鎭夷堡)→연산관(連山關)→첨수참(甛水站)→요양(遼陽)→십리보(十里堡)→성경(盛京)→변성(邊城)→거류하(巨流河: 주류하周流河)→백기보(白旗堡)→이도정(二道井)→소흑산(小黑山)→광녕(廣寧)→여양역(閭陽驛)→석산참(石山站: 십삼산十三山)→소릉하(小凌河)→행산역(杏山驛)→연산역(連山驛)→영원위(寧遠衛)→조장역(曹庄驛)→동관역(東關驛)→사하역(沙河驛)→전둔위(前屯衛)→고령역(高嶺驛)→ 산해관(山海關)→심하역(深河驛)→무령현(撫寧縣)→영평부(永平府)→칠가령(七家嶺)→풍윤현(豊潤縣)→옥전현(玉田縣)→계주(薊州)→삼하현(三河縣)→통주(通州)→북경(北京)


진위사(陣慰使)

광해 12년 (1620庚申)년 7월 21일에 중국 명나라의 황제 신종(神宗)이 승하하였는데 8월초9일 명나라에서 황제의 부음을 알려 오자 8월18일 이필형(李必榮)이 특별히 진향사 (進香使)의 명을 받았다.그 후 비천공 박참판(朴彛敍)이 진위사(進慰使)로써 수망(首望) 에 올랐다. 정양필(鄭良弼)은 서장관 (書狀官)  으로 낙점을 받은 후 눈병이 생겼기 때문에 병조정랑(兵曹正郞) 목서흠(睦敍欽)으로 교체하여 대신하였다.그런데 본조에서 다시 교체하여 마침내 이계원(李繼元) 후에 이름을 지선(祗先)으로 바꾸었으며 호는 일치(一痴) 자는 선용(善用)이다 이 대신하였다.그리하여 참판공께서 조선을 대표하는 진위사로 발탁되시어 명나라로 가는 큰 임무를 맡으시고 명나라로 출발하게 되었다.이 때 공의 아드님 박노(朴魯)가 부친 참판공께서 연로하신 나이에 나라밖으로 멀리 나가는 것을 걱정하시어 병을 빙자하여 사양할 것을 권하였으나 참판공께서 이르시기를 "병에 얽매여 편안함 만을 취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시며 그 뜻을 따르지 않으시고 명나라로 떠나셨다.


경신년(庚申年) 조천일록(朝天日錄)     進香使 이필형(李必榮 저(著)

역문(譯文) (1620년 11월~1621년 5월) 까지 약7개월 동안 진향사 이필형이 쓴 조천일록입니다.

◈1620년 (광해12) 11월 21일 출발하여 가서 평산(平山)에 머물렀다.

◈11월28일 처음으로 태창(泰昌:명나라 광종의 연호)이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다.

◈12월 초6일 저녁에 안주(安州)에 도착하였다.천추사(千秋使: 중국 황태자나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에 보내는 사신)로 갔다가 돌아온 김대덕(金大德)이 이미 먼저 도착해 있었다.

◈12월초7일 비천공 박이서(朴彛敍) 및 서장관과 함께 백상루(百祥樓)에 머물고 있는 김대덕 영공(令公:정3품.종2품의 관원에 대한 존칭 영감이라고도 함)에게 방문하였다.

◈12월 초9일 납청정(納淸亭)에 도착하였다.태창황제 (명나라 광종)의 애조(哀詔:제왕이 죽었을 때 뒤를 이은 황제가 그 사실을 알리는 조서)를 가지고온 중국 사신이 이미 지나쳐서 정주(定州)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서 보고,서장관 및 비천공(朴彛敍)과 함께 술자리를 베풀었다.

◈12월13일 신연관(信輦館:임금이 타는 수레가 쉬는 객관)에서 자는데 밤에 주인이 갑자기 진위사를 모시고 사신에게 술자리를 베풀었다.

◈12월 15일 용천(龍川 )순변사(巡邊使:왕명을 군무로 띠고 변경을 순찰하는 특사)

◈12월 18일 진위사(朴彛敍)와 함께 용만부윤(龍灣府尹)에게 가서 방문하고 문안 인사를 드린후 사신들과 또한 모임을 가졌다.

◈12월19일 용만부의 장관이 와서 진위사를 보고 모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12월20일 천계(天啓:명나라 회종의 연호) 황제가 들극한 것을 알리는 등황조서(騰黃詔書 : 노란종이에 베낀 조서) 청나라때에 황제가 내린 조서를 예부에서 노란 종이에 등사한 데서 이름)을 가지고 온 사신이 용만부에 도착하였다.

◈12월22일 진위사와 함께 용만부의 장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12월23일 취승정(聚勝亭)에 모였는데 이곳은 진위사의 처소이다.저녁에 진위사와 함께 용만부의 장관을 함께 방문하였다.용만부의 장관은 기이한 술을 내오고 안주를 베풀었는데 밤이 깊도록 하마연(下馬宴 :중국 사신이 서울에 왔을 때 베풀던 연회 또는 잔치)이라 칭찬할만 하였다.

◈12월27일 봉황성(鳳凰城)을 지나갔다.

◈12월29일 진위영공(朴彛敍를 이름)이 저절로 가슴에 통증이 생겨 음식을 먹지 못하매 부득이 머물러 음식 조절을 하게 하고 먼져 역관(譯官)을 요동(遼東) 동점(棟占)아래의 처소로 보냈다.

◈천계원년 1621년 (광해군13년) 정월 초하루 분수령(分水嶺)초하구(草河口)의 사이에서 잤다.하남(河南)의 보병이 따랐지만 만려가(滿閭家)에서 능히 접대할 수 없다고 하므로 할 수 없이 바깥에 있는 굴에서 잤다.산은 울퉁불퉁 험하여 형체를 알 수 없고 추위와 괴로움은 감당할 수 없었다.

◈1월18일 송응선(宋應瑄),윤경신(尹敬信),등을 보내 진수총병(鎭守摠兵) 이광영(李光榮) 순무어사(巡撫御史)설국용(薛國用),순완사(巡按使) 진왕정(陳王庭)등 중국 관아의 관리들에게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하고 배신(陪臣 :조선의 사신이 스스로를 자칭하여 부르는 칭호)이 수도에 다다른 이유를 설명하였다.도시에 들어 왔을 때 날이 저물었는데 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부득이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자게 되었다.

◈1월25일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하였다.땅거미가 질 무렵 문이 열리고 제독(提督)의 주사(主事:상서의 모든 司 및 제성(諸省)에 둔 원외랑 밑에 벼슬)가 소리도 내지 않고 당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 사신들이 들어갈 수 있게 해준데 대하여 두 번 절하면서 예를 표하니 주사가 이에 답하여 절하였다.

◈1월26일 주사(主事)가우리를 전송하여 떠나 보내니 길에서 그 은덕에 대한 보답으로 조선의 토산물을 바쳤다.총독(總督)군문(軍門:명나라의 총독 또는 청나라의 제독인 문구(文球)가 두껍게 낀 짙은 구름에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옮겨와 요동의 군사적 임무에 따라 우리를 호응한다는 내용의 서찰을 받아왔다.결국 망해정(望海亭)에서 교유하였는데 나는 크게 꺼려 싫어하였고 진위영공(朴彛敍)또한 병을 칭탁하여 가지 않고 노새를 돌보면서 머물러 있었다.

◈2월초4일 별산점(別山店)에 도착하였다.길가에는 앞서갔던 진향사 이덕재(李德哉) 진위사 이사훈(李士薰) 서장관 변삼근(卞三近)의 행차 흔적이 있었다.어제 북경을 떠나 아랫길을 따라 간 것으로 생각된다.

◈2월초5일 삼하현(三河縣)에 도착하였다.진향사의 행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이덕재가 우거하고 있는 처소에서 더불어 서로 만났다.집에서 부쳐온 편지에 따라 이택룡(李澤龍)을 보냈다.

◈2월초6일 그들과 우리들 두 사신 행차의 사람들이 모두 임시 처소에 모였다.이사훈이 술자리를 베푸니 나 또한 시장에서 사온 술을 내놓았다.모두들 슬피 울면서 술을 마신 후 서로 이별하였다.

◈2월초9일 옥하관(玉河館)에 도착하여 동조(東照)에 처소를 정하였다.최영(崔永)이 동지사 (冬至使:해마다 동짓날에 중국에 보내는 사신)를 수행하여 먼져 도착하였는데 와서 알연하였다.

◈2월초10일 동지사 임석령(任碩齡) 최정운(崔挺雲)이 우선 서조(西照)에 처소를 정하매 식사를 마친 후 와서 알연 하였다.저녁에 비천공(朴彛敍)과 더불어 서조에 가서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2월12일 먼동이 틀 무렵 눈(雪)을 무릅쓰고 대궐로 나아가 조정에서 올리는 서찰과 술을 지니고 방문하여 알연하였다.

◈윤2월 초2일 제본(題本:명나라 때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로서 병제(兵制) 형제(刑制) 전량(錢糧)등 공사(公事)에 관한 것을 말함)이 내려진 지 이미 3일이 지났지만 오히려 진향(進香:향을 피우고 절함)의 날짜는 정해지지 않아 장차 고낭중(賈郎中)에게 정문(呈文:하급 관청에서 상급 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을 올려 뜻을 물으니 분명하게 결의된 것이 따로 없다는 비답만 돌아왔다.

◈윤2월 초5일 대당(大堂)과 사제사(祠祭司: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에 공문을 보내 해당 관리에게 60량의 은자(銀子:은으로 만든 돈)을 줄 것을 약속하니 해당 관리가 이내 10일 뒤 능에 올라가는 것을 허락 하였다.또 일이 완료되면 두루 편지를 하여 먼져 아뢰고 우선 말하여 상을 줄 것을 청하고 주객사(主客司:빈객을 대접하는 일을 맡은 관청)의 해당 관리에게는 27량의 은자를 지급하기로 하자 그 관리들은 급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였고 예의도 인정도 없었다.

◈윤2월 초6일 능에 올라가는 날짜가 12일로 정해졌다고 알려왔다.

◈윤2월 11일 대궐에 들어가 능에 올라가는 것을 조정에 아뢰었다.

(조천일지에 기록되어 있는 북경시 천수산 신종(神宗)릉을 포함에 명 13릉)

천수산에 펼쳐진 명 13릉의 분포도인데 불이 켜진 곳이 황릉의 위치들이다(조천일지 윤2월12일)참조

신도를 보위하고 있는 동물형상들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조천일지 윤2월12일)참조

가장 큰 규모인 장릉의 능은전 모습이다. (영락永樂)성조(成祖)(조천일지 윤2월12일)참조

신종(神宗)벽화

측백나무에 뒤덮인 정릉의 (신종 神宗) 명루이다.


신종(神宗) 만력황제(萬曆皇帝)는 명(明)나라 제13대 황제로 이름이 주익균(朱翊鈞: 1563 ~ 1620)이고, 목종(穆宗)의 셋째 아들이다. 목종이 병사한 후 황위를 계승하여 48년간 재위하였으며 58세에 병사하였다. 장지는 정릉(定陵: 지금의 북경시 13릉)에 있다.

주익균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6세 때 그는 목종이 궁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보고 즉시 그 앞을 가로막으며, "아바마마께서는 천하의 황제이신데 홀로 말을 타고 빨리 달리시다 떨어지면 큰일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목종은 크게 기뻐하며 당장 말에서 내렸으며, 그후 그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1572년 윤 3월에 목종이 병사하자 그는 동년 6월 갑자일(甲子日)에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연호를 "만력(萬曆)"으로 개칭하였다.

신종은 불과 10세의 어린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고공(高拱), 장거정(張居正), 고의(高儀) 등이 정무를 잘 보좌하였다. 특히 장거정은 신종의 학문을 지도하면서 유능한 대신을 선발하여 그에게 치국의 도리를 교육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일조편법(一條鞭法: 田賦, 丁役 등 여러 세역을 一條로 간편하게 하여 은납제로 징수한 세법)"을 추진하고, 관리들의 행정업무 정돈과 불필요한 인원의 감축, 황하(黃河) 치수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정치적 위기를 무사히 극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종은 성년이 되어 친정을 펴면서 궁궐의 정원을 수축하는 등 대단위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주색에 탐닉하여 정사를 팽개쳤다. 게다가 장거정의 죽음으로 개혁이 중단되면서 조정은 또다시 보수적으로 돌아갔으며 국력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신종의 탐욕으로 극히 부패해진 명나라 조정은 마침내 국고가 탕진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1616년(만력 44) 동북지역에서는 누르하치가 만주 여진족의 각 부락을 통일한 후 후금(後金)을 세우고 명나라와 대치하였다. 이로써 명 왕조는 이미 멸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세 역사가들은 명의 멸망 이유를 신종에게 있다고 평한다. 1620년 7월 신종은 병이 들어 보름간 식음을 전폐하다 8월 병신일(丙申日)에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56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북경성 북쪽에 있는 명왕조 왕릉에 대한 발굴을 시작하였다. 명대의 황제는 모두 16명인데 그중 13명의 왕릉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13릉"이라 일컫는다. 첫번째 발굴 대상으로 정릉(定陵)을 택하여 성공적으로 발굴을 마쳤으니, 이 정릉이 바로 신종 만력황제의 능묘인 것이다.

1년간의 발굴을 거쳐 정릉의 지하가 공개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화려하게 단장된 지하궁전에서 3000여점의 귀중한 문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하궁전의 발견으로 명왕조의 쇠망이 주색과 재물에 눈이 먼 만력황제에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만력황제는 생전에 자신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직접 이 지하궁전을 수축할 구상을 하였다고 한다. 정릉은 지하 깊이 27m, 총면적 1195㎡으로 전부 돌로 이루어진 아치형 건축이다.

   신종의 지하 능묘

지하능묘 입구

정지하궁전은 전(前), 중(中), 후(後), 좌(左), 우(右) 5개의 크고 넓은 전당(殿堂)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전(中展)에는 한백옥(漢白玉)으로 조각한 3개의 보좌(寶座)가 놓여 있고, 좌전(左殿)과 우전(右殿)에는 관을 놓은 침상만 있고 관은 없으며, 후전(後殿)에는 만력황제와 효단황후(孝端皇后), 효정황후(孝靖皇后)의 관(모형 관)이 놓여 있다.


◈윤2월 12일 능에 도착하여 진향례를 행하였다.양과, 돼지 각 1마리 전체과자(全體果子:온전한 과일)5품,떡 두그릇씩 각 5품 오색과실,용안(龍眼:병이 없는 상록나무의 열매)인 여지(여支)나무의 열매,연꽃 열매,소나무 열매,건포도 각 한 그릇,밥 세 그릇,면 세 그릇,채소 세 그릇을 바치고 사신이 나아가 애도문을 읽고 향을 올리고 폐백을 올렸다.이어서 세그릇에 술잔을 올리고 5배(拜)를 행하였다.인하여 부복(俯伏:머리를 숙여 땅에 엎드림)하니 홍로시에서 제문을 읽으면서 세 번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몸을 곧바로 편 후 한번 읍(揖)하도록 한 후 모든 진향례를 마쳤다.처음에 사신들은 추포단령(추布團領:거친 베로 짠 옷깃을 둥굴 게 만든 관원의 공복)을 입고 두건에 단단한 삼으로 만든 허리띠와 관을 쓰고 차례대로 어로(御路:임금이 통행하는 길)위에 섰다.광록관(光祿官)두 사람이 제물을 받들고 보좌하는 사람 두 사람과 아울러 서반(序班)한 사람을 부르면서 전각 안에 서면 내관(內官) 두 사람이 좌우로 나뉘어 애도문 옆에 서서 예의를 행하였다.바깥 성문에서 능 바닥에 이르기까지 어로를 쌓고 어로의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배열하였는데 중간에 세 군데 앉는 곳이 있다.

또한 영락(永樂: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황제의 장릉(長陵)에는 비각이 있는데 제1문과 제2문의 사이에는 좌우로 나뉘어 관복을 입은 제후 두쌍 갑옷을 입고 칼을 찬 장수 두쌍 등 무릇 여섯 쌍의 석물이 배열되어 있고 말 두쌍,코끼리 두쌍,낙타,코뿔소 ,사자,해태,홀 각각 두쌍씩으로 한 마리는 서있고 한 마리는 무릎을꿇고서 총16쌍의 석물이 배열되어 있다.또한 토주(土主:토주관) 두 쌍이 하나는 5문(五門:고대 궁중에 설치한 다섯 개의 문 고문(皐門), 고문(庫門), 치문(雉門), 응문(應門), 노문(路門),을 가리킴)안에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5문밖에 있다.장릉의 어로로부터 또한 각각 나누어 어로를 만들었는데 그 어로들은 각릉(各陵)에 이르고 있으며 모두 장릉의 제도와 같다.각릉에는 모두 능 앞에 2층의 누각(樓閣)을 설치 하였는데 누각 앞에는 길이가 두 칸 너비 한 칸쯤 되어 배치할 만한 상석(床石)을 놓았다.또한 누각 앞에는 전각 하나를 세웠는데 전각 안에는 의자 3개가 있어 이것이 바로 상황후(上皇后)의 좌석이며 그중 하나는 태창황제의 생모(生母)것이라고 알려지고 있다.비록 후궁으로서 황제를 낳았지만 이 때문에 함께 제향을 올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윤2월13일 객관으로 돌아왔다.

◈2월26일 대궐에 나아가 상을 수여한 은혜에 감사한 뜻을 전하였다.

◈2월27일 대궐에 나아가 사조(辭朝:외국에 사신이 길을 떠나기에 앞서 조정에 들어가 임금을 만나보고 하직 인사를 드리는 일)하고 하정(下程:사신이 사관에 도착하면 주식 등 일상 수요 물품을 보내는 것)한 황제의 하사품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제독이 어제 말하기를 황제의 하사품이 당도하면 은혜에 감사하는 것을 일시에 하라고 하였으나 마침내 하사품이 오지 않았으므로 부득이하게 은혜에 감사하는 예를 올렸다.제독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로 와서 둘러보고는 황제의 하사품을 주었으며 일행은 나아가 제독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렸다.

◈2월28일 옥하관(玉河館관)을 출발하여 달문(達門)밖에서 마음먹은 데로 성취했음에 크게 소리쳐 보았다.

◈3월초1일 노새를 돌보기 위해 부득이 출발하지 못하고 통주(通州)에 머물렀다.

◈3월초3일 손님을 모시는 무리들이 떨어진 후 오지 않았는데 일러 말하기를 감합(勘合:외국 교통의 허가증을 주는 부신 일종의 통행증)이 없어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말과 노새를 때리면서 달려 부득이 현감에게 정문(呈文:하급관청에서 상급 관청으로 보내는 공문서)을 보내 알리니 비로서 역참의 말을 얻을 수 있었으며 마침내 오시(午時:낮 12시)가 되어 출발하기로 하였다.

◈3월초4일 또 통행증이 없다고 말을 지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경계병사인 소가립(邵可立)에게 공문서를 보내자 말을 주어 비로서 출발할 수 있었다.

◈3울초9일 약속을 지켜 갈 때 잠시 머물렀던 마가점(馬家店)에 유숙(留宿)하였다.

◈3월초11일 진위사 비천공(朴彛敍) 서장관 일치(一痴:이계원)와 더불어 말곱비를 부여 잡고 가서 망해정(望海亭)을 바라보았다.

◈3월12일 마가점의 주인이 인도하여 물건을 운반하기 위해 요양(遙陽)의 소황(소黃)에 갔으나 노새가 다 팔리고 없었다.주인이 여러 사람을 둘러보면서 칼로 글자를 새기면서 공문서를 번역하였지만 주사(主事)들은 또한 글자를 알지 못하고 다만 길을 알 뿐이었다.이 때문에 계속해서 연 3일을 머물렀으니 괴롭도다 ! 괴롭도다 !

◈3월13일 관산(關山)에 도착하니 주사가 면하게 해주어 출입을 허락 받았다.

◈3월16일 사하(沙河)에서 중화(中火:길을 가다 도중에 먹는 점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옛주인이 趙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그 짐에서 지난 14일 심양이 함락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성밖에 있는 옛주인 김씨 성의 집에서 머물 게 되었는데 비천공(朴彛敍)과 일치(一痴:이계원)는 함께 음식점에서 잠시 머물렀다.

◈3월17일 출발하여 연산(連山)을 지났지만 탑산에는 10여리쯤 도달하지 못하였다.여기서 태창(泰昌:명나라 광종의 연호)황제의 진향사 유간(柳澗)과 진위사 강욱(康昱) 그리고 서장관 정응두(鄭應斗)를 만나 차례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인하여 점심 식사를 같이 하였다.우리쪽에서 식사를 준비하였는데 자못 잘 갖추었다.여기에 집에서 보내온 문서를 받아보았는데 모두 편안하다고 이르고 있었다.

◈3월19일 출발하여 가는 도중에 삼산(三山)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또 광령사(廣寧使:평안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가는 사신)로 장계남(張戒男)등을 보내니 두명의 역관이 만약 난처한 일이 일어나면 모름지기 일행을 모시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고 하였다.평안함을 알리려 온 사람들을 여양(閭陽)에서 맞이하기로 하였다.오는 배 한척이 있기에 과거의 일을 물어보니 제후의 병사들이 지난 14일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흥기하여 은밀이 나아가 불의에 그 성을 공격하였고 노비와 부녀자 40 여 명을 참혹하게 죽였다고 말하였다.또 출발하여 비로서 여양에 도착하였다.

◈3월21일 요동의 전투에서 패한 병사들이 과거에 대해서 말하는데 요동은 어제 낮에 함락되었으며 그 지역 사람들과 뛰어난 인제들이 문을 열고 끌어들여 피도 흘리지 않고 함락시켰다고 이야기 하였다.천하의 일은 이대로 갈 것인가 ? 보다 우리 일행이 돌아갈 길이 막히고 말았으니 어찌할 것인가 ? 어찌할 것인가 ?

◈3월23일 이른 아침에 출발하였으나 십삼산(十三山)에 오리쯤 미치지 못하였다.여기서 피난민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서쪽의 수달(오랑캐)들이 이미 행산(杏山)을 범하였다고 이야기 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임금께서 십삼산으로 피하였다고 하고 도 어떤 사람들은 여양(閭陽)으로 돌아갔다라고 말하므로 돌아다니는 소문이 자못 거짓 소문이 많았다.

◈3월24일 영원(寧遠)에 도착하였다.위사(衛使:호위하는 사신)송경신(宋敬信)이 가서 경비에게 하소연 하니 이에 바다를 가로 지르는 양곡을 운반하는 배를 호위하는 배 한 척을 얻을 수 있다는 회답을 얻었다.그러나 배의 크기가 적어 바다위에서 감당할 수 없으므로 우리들은 마땅히 바다 위에 이르러서도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였는데 군문(軍門:명나라의 제독)인 문구(文球)가 공문서를 보내 천진(天津)에서 사람들을 징발해서 일을 처리해 주었고 혹 채소를 싫어 나르는 배를 보내 주기로 하였다.

◈3월25일 김성남(金聖男)등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도착한, 공문을 찾게 하기 위하여 머물렀다.

◈3월26일 김성남 등이 뒤쫓아가서 관에서 작성한 공문을 호송하고 경비병들을 달래서 도착하였다.그들에게 여행 비용으로 은(銀)十량을 지급하였다.그들이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모두 배가 적어 바다로 내려가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해야만 군문(軍門:제독)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경비병의 이름은 왕화정(王化貞)이고 차관(差官: 임시 관리)의 이름은 주응과(朱應科)라고 말하였다. 낮에 전위(前衛:맨 앞에 있는 경비 부대)가 도착하였다.

◈3월27일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하였다.여양의 서쪽으로부터 패잔병과 도망하여 살아오는 자 그리고 촌락민들로 피난하여 오는 자 등이 가로질러 400 여리에 뻗쳐 관성(關城:산해관성)밖에까지 이르렀다.이들이 변경을 가로막고 논에 모여 있기에 사람들의 통행이 불가능 하였다.또한 성문은 닫혀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열린 틈을 비집고 사람과 말을 통행시키고 있었다.해자 바깥에 앉아 사람을 보내 위로 보고가 올라갈 수 있도록 하니 경비병과 임시관리가 나란히 주사에게 공문서를 올렸다.신시(申時:오후3시에서 5시 사이)에 겨우 나성(邏城:성을 둘러싸고 있는 호위성)에 들어가 주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잤다.

◈3월28일 먼저 역관을  주사(主事)에게 보고하니 임시 관리로부터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고 겨우 들어가서야 나성에서 매우 어렵게 지냈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다.배를 찾아서 바다를 가로질러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주사에게 보고 하니 주사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다만 성문을 관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우리들이 장차 영평(永平)의 길을 담당하는 경비병들에게 그 뜻을 보고하여 올리고 우리들이 마땅히 도와주는 말을 하여 일을 주선하겠다."고 말하였다.또한 문을 지키고 서있는 수문장에게 가서 경비병을 만나 보고서를 전달하려고 하였다.관청에 도착하여 틈을 엿보아 관청 밖에서 우리 사신 일행이 친히 경비병을 볼 것을 청하니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므로 두 번 절하여 예를 표하고 우리가 돌아가야만 되는 이유를 하소연 하였다.이에 군문(軍門)에게 보고서를 올리려고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또한 노야(老爺:관리나 권세가 있는 사람에 대한 경칭 어르신)께서 이 지방을 전적으로 관할하면서 전부 구제하여 돌려보내줄 것이라고 말하였다.공문을 보여주자 대답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이 제독에게 보고서를 올리면 대답은 끝내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제독이 경비병을 들어오라고 청하므로 갑자기 일어나매 다시 뜻대로 되지 않는 이유를 보고 하고자 하소연 하니 경비병은 친히 하사품을 주고 들어갈 따름이었다.경비병이 일을 마치고 나와 제독이 통사(通事:동역관) 김성남 등을 부른다고 하매 나아가 충분히 설명하자 배 한 척을 당연히 장발하여 줄 것이라고 하므로 물러나와 틈을 엿보다가 공문서 한 통을 내주었다.공문서의 끝에 비답하여 이르기를 "우러러 영평(永平)의 경비병이 살펴보고 아룁니다."라고 쓰여 있었다.그 경비병의 이름은 두시(杜詩)로 산동(山東)사람이었다.

◈3월29일 두 역관으로 하여금 장차 제독의 비답문을 가지고 가서 경비병을 맞이하게 하였다. 관청에 공문을 넣으니 대답하여 이르기를 "경비병을 시켜 오래지 않아 당연히 떠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소위 선비(船備:배의 경비병)라고 이르는 사람들은 양곡을 실은 배가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사찰하는 사람이다.이 때 절강성 사람인 진금(陳金)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첩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 어제 내가 형벌을 주는 제독을 따라 귀국(貴國:상대방을 높혀 그의 나라를 이르는 말)에 가서 위임에 따라 수군(水軍)이 진치고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 보았는데 수군으로 말미암아 갔다가 수비(水備:해군 경비병)으로 말미암아 왔으므로 해로(海路:바닷길)잘 안다.만일 나를 청하여 간다면 공로를 한 번 세우고 싶다"라고 말하였다.이에 진금으로 할 것을 청하니 경비병이 웃으면서 허락하였고 또한 양식이 떨어졌음을 하소연하니 문서 기록원으로 하여금 명목을 세워 주도록 하므로 제독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4월 초1일 통역관을 관청에 보내 빨리 출발할 수 있도록 경비병에게 품처하여 하소연 하도록 하니 경비병은 영평부(永平府) 통판(通判:각 부에서 양식의 운반 수리 등을 맡아보던 벼슬)이 분리하여 관리 하는 산해관의 호위병으로 하여금 검사하여 바닷배를 조달하도록 하였다.

◈4월초3일 통판(通判)이 배를 빌리는 값을 매 척당 5백양으로 하고 지금 오척을 사용함에 2500양으로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조금 있다가 경비병이 통판에게 사람을 보내 이야기 하기를 빨리 징발하라고 말하였다.또 임시 관리가 이야기 하기를 관청에 있는 수부(水夫:뱃사공)에게서 병선(兵船)과 화기(火器)활과 화살을 모두 갖추었다.이제 출발하여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선박을 빌려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 반드시 중문(中門:한가운데 문)에 올라 잘 살펴본 뒤 지시하라고 말하였다.그 말이 어찌나 절절하고 믿음이 가는 말인지 모르겠다.대개 통판이 선박을 임대하고자 하는 말이나 천총(千摠)이 다만 양곡을 운반하는 백성들의 배가 있으니 마땅히 빌려서 보내야 한다고 한 말은 더불어 이익을 나누려고 하였기 때문인 것이다.진금(陳金)과 통판(通判)은 또한 같은 이치로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중원(中原:중국인)사람들의 마으씀이 같은 모양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4월 초4일 통판이 직접 가서 선박을 가려 뽑아 5척을 정하였다.제독은 임시벼슬을 개정하였는데 그것은 진금(陳金)이 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월초5일  경비병에게 하소연 하여 말하기를 " 일행의 하인 숫자와 배에 싣는 물건이 적은데 배의 숫자는 많음으로 청컨대 선박의 숫자를 줄여 주십시오 " 라고 하자 배 한 척을 줄였다.실은 우리나라에 가서 접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난색을 표한 것이었다.

◈4월초8일 견고하고 치밀한 선박을 얻어서 빨리 출발하기 위하여 제독에게 보고서를 올리니 하소연 한 바를 이를 수 있도록 준칙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의 관문서로 하여 주고는 경비병의 문서에는 진금으로 하여금 영평부 경비병에게 가서 하사품을 주려고 하였는데 이는 이틀전에 영평부에 갔었기 때문이다.서장관이 진금과 함께 가서 선택한 4척의 배를 살펴보고 해질 무렵 역관들과 함께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저녁 등을 밝혔다.(밤새도록 마셨다)

◈4월11일 역관을 보내 빨리 떠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품처를 하소연하니 경비병이 대답하기를 제독의 비답문서가 내려오면 당연히 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통역관들이 문서를 설명하자 진금(陳金)은 노야(老爺:관리나 권세가 있는 사람의 대한 경칭 어르신)에게 뇌물을 주어야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말하였다.이 말대로라면 진금은 길에서 아뢰었을 뿐 실제로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니 누가 자취도 남기지 않는 사람을 보냈단 말인가 ? 이제 밤에도 일하는 심부름꾼을 영평부 경비병에게 보내서 임시 벼슬직으로 하여금 빨리 출발할 수 있도록 조처해달라고 이야기하여야 할 것이다.다만 먹을 양식이 떨어졌으니 길을 알지 못하는 것까지 연달아 하소연 한다면 가히 가엾게 여겨 줄 것이다.

◈4월13일 인시관리인 유유괴(劉惟魁)와 서장관이 가서 배를 선택하였는데 뱃사람인 단문걸(單文傑)이 문서로 사고파는 것을 서로 의심하므로 임시관리가 처결하여 보고한 뱃사람의 성명을 열어보니 첫 번째 뱃사람은 25호인 장주색(張朱色)이고 두 번째 뱃사람의 우두머리는 왕휘조(王輝祖)라고 불렀으며 세 번째 뱃사람은 17호 손국용(孫國用)네 번째 뱃사람은 2호인 단문걸로 모두 양주(陽州)계통의 병선(兵船)이었다.

◈4월14일 밤일을 맡은 임시관리가 표문(票文:관청에서 발급한 문서)을 가지고 소리질러 이야기 하기를 뱃사람들이 반년치 돈과 양곡을 요청하나 다만 1개월치 양곡이나 4개월치 양곡을 줄수 있다고 말하였다.또 손국용을 돌려보내 줄 것을 하소연 하였으나 다른 선박만 허락하였다.

◈4월15일 가서 제독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또한 임시 관리에게 돌아갈 수 있겠끔 배를 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제독과 임시 관리가 말하기를 불행하게도 군사적 변란을 만나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였다.처소로 돌아와 관대를 벗고 배가 도착해 있는 곳으로 나갔다.비천공(朴彛敍)은 저녁에 묘당에 가서 구들방에서 잠을 청하였고 이계원과 나(李必榮)는 선창(船艙:물가에 다리처럼 만들어 배를 대는 곳)가에 있는 방에서 잠을 잤다.

◈4월18일 비천공(朴彛敍)이 처소로부터 와서 도착하였다.임시관리도 오후에 도착하였다.또 물건들도 모두 싫었다.신시(申時:오후3시~5시 사이)초에 임시관리와 함께 해안가에서 바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좋은 운세로 오늘과 같은 길일을 얻었음을 보고하였으나 선원들이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여 모든 배들을 잘 타이른 후에야 겨우 정박한 곳에서 수백보 정도를 움직일 수 있었다. 제물로는 양과 돼지 각1마리 돼지머리 하나,닭1마리 익혀서 갖추었고 제문에는 계속해서 술 3잔을 바치면서 신에게 바라고 신주에게 절하도록 하였다.술잔을 바치고 신에게 말하고는 모두 네 번 절한 뒤 끝냈다.

◈4월19일 뱃사람들이 출발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여 부득이 하게 정박하고 머무렀다.

◈4월20일 연속하여 며칠 동안 바닷길을 열 생각도 없이 머무르고 있으므로 어던 사람들은 간곡히 청해야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임시 관리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강하게 경계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못하고 있으므로 송은선(宋應瑄)을 보내 재촉하니 임시관리가 답하여 말하기를 내일이면 마땅히 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뱃사람들도 또한 이르기를 내일이면 분명히 출발하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4월 23일 뱃사공의 무리들이 나에게 요청하는 바를 알지 못하였고 나 또한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지를 잘 알지 못하였다.겉으로는 출발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속으로는 실제 옮겨 가는 것을 연기 했으면 하였던 것이다.그리하여 매양 조수(潮水:달의 인력에 의하여 주기적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고 밀려 나가는 현상) 때문에 부득이 하게 작은 배를 매달아 놓은 것이라고 나를 혼란 시켰다.나는 한인들을 이끌고 가서 감독하여 모래가 쌓여 있는 곳을 뚫어 파 보았다. 결국 조수의 흐름을 비교하여 넘어오는 파도를 크게 막아 바닷물의 흐름이 포구(浦口)에 이르는 것과 사탄(沙灘:물가나 물 가운데 모래가 침적되어 이루어진 모래땅)에 배를 매달아 놓았기 때문에 뱃사람들이 온 힘을 다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4월24일 조수(潮水:아침조수)가 이른 새벽 물러갔지만 아직 손을 대지 못하였다.저녁 조수를 타고 정박해 있는 곳에 이르자 뱃사람들이 정박해 있는 포구 바깥으로 나왔다.장씨 성을 가진 천총(千摠:명나라 때 훈신으로 군영을 관장하는 직책)이 장씨 성을 가진 수비(守備:경비병)에게 주고 받은 뇌물을 수색하기를 청하는 모양의 서찰을 품신하여 아뢰었지만 서찰을 보고는 작은 종이로 원망하면서 찢어 없애 버리니 장씨의 뜻이 저지되어 그쳤다.

◈4월25일 마침 서남풍이 불어 배가 동쪽으로 가는 것을 막았따.해질무렵 장산도(長山島)를 지나 저녁에 국화도(菊花島)에 도착하였다. 국화도에서 편안하게 먼곳까지 호위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온 양곡선 3백여 척이 이미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5월초2일 낮 12시에 서풍이 맹렬하게 불어 남쪽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가는 길에는 중도(中島)주도(珠島)를 지나 하루를 머무를 수 있는 섬에 이르를 수 있는데 배를 멈추고 마을 앞에서 유숙할 수 있으며 마을 의 이름은 사어만(沙魚灣)이라고 하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곳으로부터 약 4~500백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였다.

◈5월초4일과 초5일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5월초6일 배가 출발하여 바닷길을 열었으나 불행하게도 바람이 거꾸로 불고 구름이 일어나 바다가 어두어 앞으로 나갈 수 없기에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와 정박하였다.초2일부터 동남풍이 연일 불어오므로 계속해서 머물 수 밖에 없었다.이에 식량이 장차 없어지고 정박해 있는 배에 도적들이 모이며 변화도 또한 예측할 수 없어 근심과 번민을 어찌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도적들은 우리가 출발하여 가는 것을 보고는 흩어져 갔다.

◈5월초7일 밤에 마을에 개들이 모여 짖는 것을 듣고 도적 무리들이 우리가 돌아와 정박해 있는 것을 알고 다시 와서 탐색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이른 아침에 일어나 보니 과연 도적들이 와서 산 정상에 모여 바야흐로 화포를 가지고 큰소리를 지르면서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도적들이 국경비역에서는 뜻하지 않는 우환을 만든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부득이 이른 아침에 동남풍을 따라 배를 뛰어 곧바로 봉성도(鳳城島)로 갔다.섬을 떠난 지 십리쯤 되어서야 닻을 내렸다.날이 저물고 바람도 그치자 정박하여 머물 게 되었는데 밤이 지나서야 이곳이 똑바른 길이 아님을 알았지만 바람이 거꾸로 불어 전에 갔던 곳으로 갈 수 없었기에 비뚤어지게 이곳에 이른 것이었다.

◈5월초8일 해가 뜬 후 노를 저어 포구에 들어가니 2~3척의 선반이 밤에 이미 들어와 정박해 있었다.식사를 마친 후 파수총(把守摠:군사적 요지를 지키는 무장의 우두머리)조좌구(趙佐具)와 절하였고 공문서가 와서 보니 우리무리 세사람이 돌아온다고 하였다.또다시 조좌구에 감사를 표하니 조좌구가 말하기를 "이곳으로부터 여순(旅順)항구까지 가는 데는 350리가 되고 등주(登州)까지 이르는 데도 또한 같습니다.이 섬은 한 반쯤 되는 곳에 있으니 어젯밤 일경(一更:저녁8시)이 지난 뒤에 말을 달려 등주에 보고 하였으니 지금쯤 이미 도달하였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가 사시(巳時:오전 9~11시 사이)쯤으로 생각된다.

◈5월초9일 파루(罷漏:바다 오경삼점 즉 5시무렵에 큰 쇠북을 서른 서 번 치던 일 통행금지를 해제하던 신호)때를 헤아릴 무렵 배를 출발하여 동쪽으로 가서 저녁에 황안주(黃晏州)에 도착하였다.황안주는 여순(旅順)에서 동남쪽으로 5~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곳은 유지와 연접해 있는땅으로 여순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다.2~3.4척의 선박은 대단히 빠르고 민첩하기 때문에 배가 운항할 때에는 예에 따라 그러한 선박들을 먼저 앞세운다.오늘도 또한 그 선박들이 먼저 가서 황안주의 산 아래 정박할 만한 곳에 이르렀고 우리 배들이 산 아래서 그쳐 쌍안(雙岸)15리쯤 되는 바닷 가운데 정박하였다.

◈5월10일 (辛亥) 새벽녘에 비가오기 시작하여 해안가 10여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았으나 조용하였다.진시(辰時:오전7시~9시 사이)끝무렵 큰 바람이 동남 동북쪽으로부터 갑자기 일기 시작하였는데 그 세력이 장차 머무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겨우 닻을 올리고 돛을 반쯤 매달고는 바람을 따라 바햐흐로 배들이 철산취(鐵山嘴:취는 곶(串)을 말함)로 돌아가려고 쌍도(雙島)에 정박하였으나바람의 세력이 더욱 급해지고 또한 거꾸로 불어 오므로 배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사람을 놀라게 할만큼 거세게 솟구치는 파도가 닥쳐오는 것에 배는 그대로 맡기어 있었고 배 위에는 하늘을 뒤집어 엎을 정도의 파도가 덮치고 있었다.파도의 앞부분은 마치 하늘 위까지 오를 것만 같은 모습으로 들이닥쳤고 파도의 속 부분은 만길 구렁텅이로 떨어뜨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구름 안개가 끼고 어두컴컴하여 가까운 곳도 분간할 수 없었다.일행 중 일을 처리하는 관원이 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말하였고 뱃사람들도 또한 놀랍고 두려운 가운데 배가 뒤집히지 않을까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얼마쯤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난 뒤 해가 지고 밤이 되었는데도 배는 어떤곳에 닿아 그치지 않고 파도를 따라 그대로 표류하였다.

◈5월11일 이른 새벽에 비가 그치면서 바람도 조금 멎었다.홀연히 산이 보이기에 돌연 뱃머리를 돌려 산 아래로 들어갔다.산에 의지하여 닻을 내리니 겨우 배를 보존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 이미 하늘이 밝아올 무렵 유씨 성을 가진 임시관리와 장씨 성을 가진 천총(천총:명나라 때 훈신으로 군영을 관장하는 직책)이 와서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해안가에 왔다 갔다 떠다니는 사람이 여러명 있다고 하였다.임시 관리가 배에 올라타므로 가서 물어보니 이곳은 타기도(타기島)라는 곳이라 말하면서 이섬은 봉성도(鳳城島)에서 남쪽으로 2백리에 있고 등주(登州)를 가는 거리도 이와 같다고 말하였다.이에 계산해 보니 안주(晏州)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6~7백리쯤 된 거리였다.

◈5월13일 하루종일 산 위에 해안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끝끝내 3척의 선박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등주(登州)로 부터 봉성도(鳳城島)로 가는 선박의 통행은 끊이지 않았으나 도한 마음에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5월15일 정박해 있는 곳에서 이씨 성을 가진 천총(千摠:명나라때 훈신으로 군영을 관장하는 직책을 보았다.이 천총이 말하기를 지금 등주로부터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 하기를 3척의 선박이 등주에서 60리 되는 땅에 있다고 합니다.그 지명은 황하영(黃河營)이란 곳인데 아마도 이것이 조선 사신의 일행이 탔던 배가 아닌가 합니다.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탐문하고 오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이에 선박 1척을 빌려서 출발하여 보내니 신시(申時:오후3시~5시 사이)쯤으로 헤아려진다. 유씨 임시관리와 장씨 천종이 말하기를 "묘당(廟堂)에 기도를 드리면서 제사를 드리십시오."라고 하였는데 묘당은 제왕의 명으로 봉해진 성모(聖母:임금의 어머니)천비(天비:천자의 어머니)의 행궁이라고 불리워지는 곳이다.

◈5월18일 의주(義州)의 관노(官奴:관청에 배치된 노예)천천생(天天生)은 다섯 번이나 밥짓는 일로 행차를 따랐는데 4번째 선박에 나누어 실려 있었다.밤중에 뜻밖에도 와서 서장관에게 간자(簡子:편지)전하고 급히 일어나매 자세히 조사하여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5월초10일 바람과 파도가 일던 날 3번째 선박과 4번째 선박은 배를 통제하기가 어려워 여순(旅順)항구에 들어가 정박하였고 2번째 선박은 깃발을 휘날리며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곧바로 철산취로 향하여 갔습니다.3번째 선박과 4번째 선박은 여순에서 하루를 머물다가 12일 봉성도(鳳城島)를 향하여 가는데 바람은 없고 조수는 급하여 다시 뱃머리를 돌려 여순 항구밖에 정박하고 숙박하게 되었습니다.마을 사람들이 바야흐로 대포를 가지고 우리를 막으므로 어쩔 수 없이 노를 저어 동쪽으로 향한지 2틀 만에 평도(平島)에 도착하였습니다.평도에는 여순으로부터 5십리 떨어져 있는데 처음에 정박하였던 곳은 황안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또 대답하기를 "마침 호선(虎船:튼튼한 배)을 찾아 6량의 은을 배삯으로 주면서 간곡하게 부탁하여 배를 얻고는 저와 김극준(金克俊) 전의립 등을 보내 1번째 선박과 2번째 선박이 간 곳을 찾아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봉성도에 도착하여 1번째 선박이 와서 정박한 사실을 듣게 되었고 이 섬에서 1량의 금(金)을 주니 심씨 성을 가진 총병(總兵:명나라 때 각 지방에 두었던 군사 통솔관)의 초선(硝船:망보는 임무를 띤 배) 5십여척을 따라 봉성도로부터 돌아와 평도(平島)로 갈 때 저도 따라 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천생(天生)이 또한 말하기를 "이곳에 올 때 철산(鐵山)앞바다에서 두 척의 배를 만나 물어보니 곧 의주(義州)소통사(小通事:하급의 통역관) 두 사람이었습니다.4월22일로부터 우리들 일행의 소식들을 탐문 청취하고 중국인들로부터 모양새를 조사하여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문서에 의하면 요동(遙東)으로부터 광령(廣寧)에 이르기까지는 일행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지만 산해관으로부터 항해하기 까지는 도어사(都御史:명나라 때 관리를 관찰하고 탄핵하는 일과 중대 안건의 심의에 참여하는 일을 맡은 도찰원의 장관)의 말을 빌려 이르기를 적병(賊兵:청나라 병사)이 요좌(遙左)에 가득하므로 2척의 서낙을 파견하여 주어 호송하였다.15일 광령을 출발하여 돌아가 삼산(三山)등의 땅에 도착하여 육지에 내렸으며 육지를 따라 조선으로 돌아갔다."라고 적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두 번째 선박이 간 때로부터 지금까지는 8~9일인데 오히려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이 답답하여 미치겠고 근심 때문에 마음을 태우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다.3번째 선박과 4번째 선박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얻은 것은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다.

◈5월22일다시 남풍이 불어 오므로 닻을 거두어들이고 돛을 펴서 동쪽으로 향하여 갔다.나리 밝기 전 봉성도를 지나갔지만 들어가지 않았다.비천공(朴彛敍)이 간곳은 알지 못하고 바다는 넓고 하늘은 길어 가히 그 종적을 찾을 수 없으므로 울고 싶어도 마음에 품은대로 할 수 없으니 어떻게 다시 장차 무슨 얼굴로 비천공의 형제와 자식들을 볼 수 있단 말인가 ?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노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노라.

◈5월25일 해가 뜰 무렵인 새벽에 배를 출발하여 백 수십리를 갔다.신시(申時:오후3시~5시 사이) 후에 미곶(彌串)앞에 도착하였다.

◈5월26일 용천(龍川)에 도착하였다.아곳이 천자의 사신이 배를 타고 와서 조천(朝天:천자에게 알현하기 위해 하늘을 쳐다 봄)을 하기 위해 오르는 관부(官府)라고 말한다.일행은 저녁에 용천부(龍川府)에 들어갔다.철산군의 이준고(李遵古)와 금폐(今폐)등이 장계를 가지고 사시(巳時:오전9시~11시 사이)에 한양으로 향해 갔다.

◈5월29일 평안감사(平安監司)가 용천에 급히 보내온 서찰을 보았다.서찰에는"진향사(進香使)의 행차가 이미 미관진(彌串鎭)에 도착하였으므로 매우 기쁘고 다행한 일이지만 진위사(進慰使)박이서(朴彛敍)의 행차는 폭풍에 표류하여 향해 간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진향사는 이필형(李必榮)이고 진위사는 박이서(朴彛敍)이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놀랐습니다. 산해관으로부터 선박 4척을 얻어 나올 때 철산취에 도달하여 폭풍을 만나 표류하였습니다. 철산은 여순(旅順)항구 서쪽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6월27일 진향사가 장계(狀啓:임금의 명령을 받고 현지에 갔던 신하가 글로 써서 임금께 올리는 서찰)를 올려 이르기를 박로(朴魯)형제가 이미 본가에서 발상(發喪:초상난 것을 여러 사람에게 알림)하였습니다.슬프고도 슬픕니다.

◈8월13일 비천공(泌川公:朴彛敍)의 반혼례(返魂禮:장사지낸 뒤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예를 치루었다.대호공 박노(大瓠公:朴魯)이 평안도 용천(龍川)에 가서 발상(發喪)하고 혼백을 모시고 반혼례를 하였다.

◈10월22일 전교(傳敎:임금의 명령)하여 이르기를 "박이서(朴彛敍)와 유간(柳澗),강욱(康昱),정응두(鄭應斗) 및 물에 빠져 죽은 역관 등은 왕명으로 행해진 공무를 수행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빠져 죽었으니 매우 놀랍고 슬픈 일이다.특별히 증직(贈職:공이 있는 사람에게 죽은 뒤에 벼슬을 주거나 높여 주는 일)을 내리고 넉넉하게 휼전(恤典:공적이 있는 관리가 죽었을 때 나라에서 주는 여러 가지 특별한 혜택)을 베푸노라 그 집안 사람들에게 는 월봉(月俸:한 달에 지급하는 급여)을 혜량하여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다 비국(備局:비변사)으로 하여금 급히 격식을 따르지 말고 의논하여 처결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 때에 조선에 머물러 있던 명나라 사신도 돌아가려 하였으나 육로(陸路)로는 가지 못하게 되니 해로(海路)를 열도록 하였다.공의 아드님 박노께서 38세 때인 광해 13년(1621) 상소하여 한 사람만 태워 연경까지 보내줄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그 사정을 딱히 여기면서도 허락하지 않았다.

공의 아드님 박노께서는 그 때에 의정부(議政府)의 검상(檢詳-정3품)행정관으로 계셨는데 특별히 정리부사(整理副詞)를 제수 받아 항해(航海)를 감독하는 일을 하시었다.아드님 박노는 평안도 선천(宣川)에 이르러 명나라 사신을 배에 태워 보내고 해직(解職)을 청하여그곳에 머무르면서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오래지 않아 우리 사신 (진향사 이필영(李必榮)과 서장관 이영식(李永式)등이 돌아왔는데
진향사[進香使]유간 [柳澗]과 서장관 정응두[鄭應斗]는 범선이 침몰하여 익사하고 철산에 뾰죽하게 튀어나온 곳은 파도가 거칠어 위험한 해상 진위사 (朴彛敍) 참판공은 그곳에서 배가 파선되어 돌아오시지 못함을 알게되었다.

박노께서는 해상에서 발애(發哀)하고 유의(遺衣)로 초혼(招魂)하여 돌아오게 되니 곡읍(哭泣)하며 3년을 미음만 드시었고 종신토록 물고기를 드시지 않으셨다.박노께서 39세 때인 광해 14년 (1622년)12월 24일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비변사(備邊司)가 아뢰기를 참판공 박이서(朴彛敍)일에 대하여 성상의 분부가 간곡하므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립니다.그런데 저 두 신하의 자식(子息)들이야 어떻한 마음을 갖겠습니까 ?

신들이 전에 박이서를 만나 보았는데 단정(端正)하고 중후(重厚)하여 거짓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억울하게도 다른 당파(黨派)의 논핵(論劾)을 받아 서호(西湖)에 머물러 가 있으면서 벼슬 살이 할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그가 진위사로 차출(差出)되었을 때 박승종이 그가 늙고 병든 것을 안타깝게 여겨 떠날 것인가를 물었는데 박이서가 쓸쓸한 모습으로 대답하기를 " 나라일에 목숨을 바치자 하는데 어떻게 회피(回避)할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항상 그를 생각할 때면 충정어린 그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정미(丁未)년 10월에 유간이 박승종(朴承宗)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사태가 불안스러운 이 때를 당하여 병무(兵務)를 주관하는 숙위(宿衛)를 엄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가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이러하였습니다.그리고 60세의 나이에 만리(萬里)의 먼길을 떠나면서도 전혀 서운한 기색이 없었으니 그도 역시 충성을 바치는 신하(臣下)였습니다. 요즈음 비반(肥拌)들은 차견(差遣:사람을 보냄) 하는데 있어서 애초에 죽을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닌데 원망하는 말을 기탄 없이 하고 있으니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의 차이가 하늘과 땅 사이 일뿐입니다.

이 두 신하를 의당 포상(褒賞)하고 증직하여 한 시대를 격려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왕께서 전교하기를 " 아뢴대로 하라 '유간들에 대해서 어찌하여 아직까지 포증하지 아니 하였는가.급히 추등하도록 하라 그리고 유간의 아들 유여각(柳汝
)은 응당 상가(賞加)를 받아야 할 듯하고 박이서(朴彛敍)의 아들 박노(朴魯)는 모두 가자(加資)하여 충혼(忠魂)을 위로 하도록 하라.하였다"
【조선왕조실록】【33집 486면】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비암산에 시신(屍身)이 없는 장사를 지내는데 있어 묘역을 도울 인부를 제급(齊給)하여 예장토록 경기감사에게 하명을 하시여 국장(國葬)으로 장사를 모시고 참판공(參判公. 泌川公)은 증 이조판서 대제학(贈 吏曹判書大提學)추영(追榮)되시고 참판공의 아버지 돈계공 박율(遯溪公 朴栗)께서는 증 이조판서(贈증 吏曹判書)로 추영 되시었다.3년상이 끝나자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상(王)의 명이 있어 조정에서는 그의 아드님 대호공 박노(朴魯)에게도 품계 또한 높여 주자고  청할 때에는 선왕 광해군이 서인들의 인조반정 구테타로 물러나 있을 때였다.
그 후 1793 (正祖 17 )년 정조 임금께서 증 이조판서 박이서에게 충간(忠簡)의 시호(諡號)를 내리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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