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

◈ 청나라 6대 황제 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 홍력(弘曆) : 청나라와 영국의 만남, 매카트니 사절단을 접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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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청하다

2021. 3. 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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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는 통치 기간에 수많은 외국 사절들을 접견했다. 건륭 연간에 청나라를 천조로 인정하고 신하국을 자처한 국가는 조선, 유구, 안남, 면전, 섬라, 곽이객 등의 국가이다. 이 국가들은 대체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아울러 국가 안보를 담보하기 위해 대국을 섬겼다.

사신들이 건륭제에게 삼궤구고(三櫃九叩 : 황제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의 예의를 갖추고 그의 존엄함을 한껏 찬양한 후에는, 건륭제는 반드시 그들의 국가에 은전을 베풀어야 했다.

이른바 ‘조공(朝貢)’ 이라는 것은 소국이 대국을 섬김으로써 대국이 소국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는 구조이다. 따라서 때에 따라서는 조공 무역은 강제적인 면보다는 자발적인 면이 강했다.

청나라와 주종 관계가 아닌 국가들도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통한 무역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건륭제는 조공을 통해 황제의 권력과 위엄을 만천하에 떨쳤다.

그가 접견한 수많은 외국 사절 가운데 영국의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 1737~1806)만큼 훗날 중국과 서구 열강의 교류와 갈등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절은 없다.

청나라는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강희 연간부터 옹정, 건륭 연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명실상부한 대제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청나라의 경제 규모는 전 세계의 삼분의 일을 차지했으며, 제국의 영토는 오늘날 중국 면적의 1.5배에 해당할 정도로 넓었다. 이른바 “땅은 넓고 생산물은 풍부하다” 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사회와 경제 구조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획기적인 기술 혁신을 통하여 탄생한 방적기, 증기기관 등 기계 설비는 모직물, 광물, 각종 물건 등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했다. 더구나 영국은 이미 16세기부터 전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하여 전 세계의 경제권을 영국을 중심으로 운영했다.

영국에 의해서 촉발된 산업혁명은 먼저 유럽 각국을 휩쓸었으며 이때부터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중국은 명나라 때인 15세기 후반부터 서구 열강과 교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명나라는 서양 대포인 홍이포(紅夷砲) 이외에는 서구의 물건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서구 열강과의 교역도 조공 무역의 일환으로 황제 국가가 그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서구 열강은 명나라에서 차, 도자기, 비단 등 생활필수품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기 때문에 막대한 은화를 지불하고 그것들을 수입했다.

무역 역조 현상이 날로 심각해지자 그들은 명나라에 통상의 자유와 확대를 요청했지만, 명나라 조정은 오히려 수시로 해금 정책을 펴서 상인들의 자유로운 통상 활동을 제한했다.

강희, 옹정, 건륭 연간에 이르러 유럽에서는 중국 문명에 대한 동경과 공자를 숭배하는 열풍이 불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윗사람에게 복종하고 노인을 존경한다. 자녀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부모를 종교 섬기듯 하며 언행은 의젓하고 신중하다. 특히 우리 선교사들을 놀라게 한 것은 중국 농부와 노비들마저도 우리와 매일 대화를 나누거나 다음 날 만날 때마다 언제나 깍듯이 예의를 지킨 일이다. 그들의 예의 바른 행동은 유럽의 귀족보다도 낫다.”

수학의 미적분을 발견한 라이프니츠는 중국에 간 적은 없지만, 인생 말년에 마지막 저술로 『신중국학』을 저술할 만큼 중국학에 심취했다.

로마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을 만나 중국 선교를 계획할 때 그들에게 들은 얘기를 기록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중국에 가보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공자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공자는 용서, 사은(謝恩), 인애, 겸손을 촉구한다. 공자의 제자들은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동포임을 과시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존경할 만한 시대는 바로 사람들이 공자의 도를 따르던 시대였다.”

심지어 “유럽인은 도덕적인 면에서 중국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고 역설했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

독일의 계몽주의 철학자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는 공자를 예수의 반열에 올리는 연설을 했다가 파문을 당하고 조국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중국을 향한 막연한 동경은 유럽인들의 발길을 청나라로 향하게 했다. 영국 상인들은 이미 광동성 오문(澳門, 오늘날의 마카오)에서 교역을 했다.

하지만 청나라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 정부는 청나라와 무역 적자를 해소하고 중국이라는 엄청나게 넓은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통상 확대를 간절히 원했다.

1792년 영국왕 조지 3세(George Ⅲ, 1738~1820)는 조지 매카트니를 정사(正使)로 하는 사절단을 청나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건륭제의 83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방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청나라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통상을 확대하는 목적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영국 정부는 사절단의 방문을 통해 청나라의 정치, 사상, 종교, 경제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어쨌든 이는 유럽 국가들 가운데 영국이 최초로 중국에 정식 사절단을 파견한 일대 사건이었다.

같은 해 9월 26일 영국 남부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사절단의 청나라를 향한 대항해가 시작되었다. 과학자, 수학자, 의사, 선교사, 예술가, 상인 등 수행 인원이 80여 명이었으며, 항해를 책임진 수병은 95명이었다.

영국 정부는 국왕의 위세와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증기기관, 방적기, 대포, 시계, 지구본, 계측기, 서적, 모직물 등 최첨단 제품들을 선물로 준비했다. 그것들을 담은 상자가 무려 600여 개나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은 청나라 조정에서는 당시 최첨단 제품인 것들을 황제에게 바치는 조공품으로 생각한 것이다. 청나라의 오만과 편견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 정부는 사절단이 출발하기 전에 동인도회사를 통해 광동성 광주(廣州)에 주재하고 있던 청나라의 양광총독에게 서신을 보내 방문 의사를 밝혔다. 그 내용은 건륭 57년(1792) 11월에 건륭제에게 보고되었다.

건륭제는 수만리 밖의 영국 국왕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항해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사절단을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영국 사절단이 도착하는 지역마다 그들에게 필요한 음식물들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게 했다. 아울러 그들을 태운 선단이 북경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천진(天津)에 정박할 수 있게 했다.

천진 정박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청나라는 외국인의 입국과 출국을 아주 엄격하게 통제했다. 서양 상인들은 광동성의 광주(廣州), 오문(澳門) 등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으며, 지정된 도시를 벗어나면 엄한 형벌을 받았다. 외국의 선단도 광동성 연안의 항로 이외에는 절대 항해할 수 없었다.

원래 영국 사절단도 광동성에 상륙하여 내륙을 통해 북경으로 들어가야 했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건륭제는 특별히 그들에게는 해안을 따라 천진까지 들어오게 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사실 그는 영국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영국 국왕이라는 자가 천조 황제의 은덕에 감동하여 스스로 신하의 나라를 자처하고 사절단을 파견하여 조공을 오는 걸로 착각했다.

사절단을 태운 라이언(Lion) 호는 대포 60여 문을 장착한 최신 전함이었다. 아프리카 희망봉과 말라카 해협을 지나 남중국해 연안을 따라 북상했다. 항해 도중에 질병에 걸려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시신을 바다에 던지고 거친 파도와 싸우며 계속 항해했다.

조지 매카트니 백작(1737~1806)

다음 해 7월 1일 출항한지 10개월 만에 마침내 양자강 하구, 주산(舟山) 열도에 상륙했다. 이때 라이언 호 이외에도 동인도회사 소속의 대형 화물선 힌더스탄(Hindustan) 호도 합류했다.

사절단이 해안 도시들을 통과할 때마다 지방 관리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영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청나라 관리들은 그들을 ‘영국에서 공물을 바치러 온 사절단’ 으로 칭하고 그들이 가지고 온 선물도 ‘공물’ 이라고 표현했다.

매카트니는 영국과 청나라는 동등한 ‘제국’ 이므로 그런 불평등한 표현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양국 간의 국교를 수립하고 통상을 확대해야 하는 책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묵과할 수밖에 없었다.

건륭 58년(1793) 7월 말 사절단이 천진에 당도하자 흠차대신 징서(徵瑞)가 그들을 맞이했다.

당시 건륭제는 열하(熱河)의 행궁(오늘날 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에서 요양 중이었다. 사절단은 북경에서 며칠 머무른 뒤 피서산장으로 떠났다. 그런데 피서산장으로 가는 도중에 마찰이 빚어졌다.

징서는 매카트니에게 황제를 배알할 때 반드시 세 번 무릎 꿇고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고 말했다. 청나라는 ‘천조(天朝)’ 이므로 어떤 외국 사신도 신하의 신분으로서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더구나 영국 사절단은 황제가 초청해서 방문한 게 아니라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많은 공물을 가지고 찾아온 ‘불청객’ 이므로 영국이 청나라를 섬기겠다는 뜻이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청나라는 임금과 신하 모두 영국이 얼마나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세상의 중심은 오로지 청나라이며 나머지 나라들은 모두 주변국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외교’ 는 천조가 속국에게 조공의 방법으로 시혜를 베풀고 속국은 천조를 어버이로 섬겨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는 영국도 천조의 위세와 황제의 위엄에 감복하여 스스로 찾아온 속국에 불과하고, 사절단이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는 일은 지극히 당연했다. 사절단이 관례에 따라 했을 때 황제는 용안에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어주면 그만이었다.

매카트니는 청나라의 그런 의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국은 이미 본토 면적의 백배가 넘는 광활한 지역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는 대제국이 아닌가.

만약 청나라의 관례대로 건륭제를 배알하면, 이는 엄청난 굴욕이었다. 청나라의 무지에 통탄했지만 항해의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도착했는데도 아무런 실적도 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건륭제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당장 그들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각국의 사절단들이 속속 피서산장에 도착하는 상황에서 황제의 도량이 좁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일단 격식을 낮추어 그들을 접대하게 했다. 쌍방 간에 설전을 벌인 끝에 애매한 합의를 보았다.

사절단은 영국 국왕을 배알할 때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의식을 치르기로 했다. 어쨌든 무릎을 꿇는다고 했으니 건륭제도 윤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북성 승덕 피서산장

피서산장

건륭 58년(1793) 8월 13일, 건륭제의 83세 탄신일에 사절단은 마침내 피서산장 만수원(萬樹園)에서 건륭제를 배알했다.

매카트니는 그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사절단은 자리에 앉은 후 황제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황제가 물었다.

‘너희 영국 국왕은 금년에 나이가 몇 살인가?’

황제는 우리 얘기를 듣고 말했다.

‘짐은 올해 83세이오. 그대들의 국왕도 짐처럼 장수하기를 바라오.’

황제는 이야기를 하면서 득의양양한 모습이었고, 표정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있었지만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리 눈앞에 앉아있는 이 나이든 어른은 영국의 노신사와 같았다. 신체가 건강하고 원기가 넘쳤는데 80세가 넘는 노인이라지만 실제로는 60세 남짓 보였다.”

매카트니는 건륭제에게 조지 3세의 친서를 전하고 예물들을 바쳤다. 건륭제도 정교하게 조각한 사문석(蛇紋石)을 답례품으로 하사했다.

사절단 중에는 조지 토마스 스톤튼(George Thomas Staunton, 1781~1859)이라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매카트니의 친구이자 사절단의 부사(副使), 조지 토마스 스톤튼 준남작(1737~1801)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하여 데리고 왔다.

그런데 열세 살 먹은 조지 토마스는 아주 영리했다. 기나긴 여정 동안 역관에게 한어(漢語)를 배워 어느 정도 말하고 쓸 줄 알았다. 건륭제는 귀여운 서양 아이가 한어를 구사하고 자기 말을 알아듣자 기분이 무척 좋았다. 오히려 역관보다는 그에게 통역하게 했다.

황제만이 지닐 수 있는 노란색의 향주머니를 친히 건네주기도 했다. 황제와 사신들 간의 불편한 긴장이 뜻밖에도 그에 의해서 말끔히 해소되었다. 훗날 그는 영국 최초의 중국 전문가가 되었다.

재위 말기의 건륭제 모습

화신(1750~1799)

매카트니는 성대한 연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방문의 또 다른 목적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각국 사신들이 황제의 위세에 눌려 말 한 마디도 못하는 상황에서 감히 나설 수 없었다. 연회가 끝난 다음 날 관리들에게 영국 국왕의 뜻을 다시 간곡하게 전했다.

먼저 북경으로 돌아가 어명을 기다리라는 연락을 받았다. 건륭제는 천조의 위업과 자신의 위세를 각국 사신들에게 마음껏 뽐냈으며, 사신들도 푸짐한 선물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으므로 영국 사절단도 돌아가기를 바랐다.

건륭제의 총신, 화신(和申, 1750~1799)이 황제의 뜻을 전하자, 매카트니는 국교를 맺는 일은 실패로 끝났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외교 관계는 맺을 수 없더라도 통상 조약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래는 매카트니가 청나라 조정에 요구한 6개 항이다.

* 첫째, 영국 상인은 영파(寧波), 주산(舟山), 천진(天津) 등에서 교역을 할 수 있다.

* 둘째, 영국 상인도 러시아 상인처럼 북경에 양관(洋館)을 설치할 수 있다.

* 셋째, 주산 부근의 섬 한 곳을 영국 상인이 거주하고 화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할 수 있다.

* 넷째, 광주(廣州) 부근의 일부 지역을 영국인에게 할양하여 영국인의 자유 왕래를 보장한다.

* 다섯째, 오문에서 광주로 가는 영국 화물은 면세 또는 감세 혜택을 준다.

* 여섯째, 영국 선박에 대한 관세는 청 정부의 규정에 따라 부과하며 별도의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다.

매카트니의 무리한 요구에 분개한 건륭제는 즉시 영국 국왕에게 보내는 칙유(勅諭)를 반포했다.

“천조(天朝)의 좁은 땅도 모두 국가의 영토에 귀속되어 있다. 영토를 관리하는 일은 참으로 엄격하므로, 도서(島嶼)와 사주(沙州)도 반드시 경계를 분명하게 정하여 각각 소속된 곳이 있다.…… 천조는 산물이 풍부하여 없는 것이 없다. 이런 까닭에 원래부터 외국의 물건을 빌려 천조에 없는 것을 보충한 적은 없었다. 다만 차, 도자기, 비단 등 천조의 특산물이 서양 각국과 너희 나라에서 절실히 필요한 물건임을 특별히 고려하여 은혜를 베풀었다. 이에 짐은 오문에 양행(洋行)을 설치하여 너희들에게 윤택한 생활을 누리게 했다. 지금 너희들의 요구는 천조의 법도에 어긋나기 때문에 절대 윤허할 수 없다.”

자신의 요청 사항을 한 가지도 관철시키지 못한 매카트니는 낙담한 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귀국길은 내륙 운하를 따라 이어졌으며 건륭 59년(1794) 3월에 광주에서 배를 타고 영국으로 떠났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막대한 자금을 쓰고도 국교 수립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들은 방문 도중에 목도한 청나라의 정치, 경제, 군사 등의 사정을 낱낱이 기록했다.

황제와 신하들은 세상 물정을 모른 채 자만에 빠져있고, 지방 관리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뇌물을 주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었다. 군사는 아직도 창칼을 휘두르고 화승총, 대포 등의 무기도 낡고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 백성 모두 공자의 도를 숭상하여 예의가 바르고 화목하게 지내는 문명 대국인 줄만 알았는데 막상 와보니 사기와 거짓말이 난무하고 사는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반야만인’ 의 생활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매카트니는 청나라의 허상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조지 3세에게 보고했다. 이때부터 영국 정부는 ‘동방 대국’ 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언젠가는 식민지로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훗날 매카트니는 청나라를 이렇게 평가했다.

“다행히 유능하고 방심하지 않는 항해사가 키를 잡으면 무사히 항해할 수 있지만, 무능한 자가 키를 잡으면 서서히 표류하다 해안에 부딪쳐 산산조각 나는 낡은 거대한 전함과 같다.”

매카트니의 역사적 방문이 있은 뒤 47년만인 도광(道光) 20년(1840)에 영국과 청나라 간의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기나긴 역사의 암흑기 속으로 들어간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할 때까지 1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국은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했으며 또 일본의 침략을 받아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중국의 쇠퇴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동아시아 세력 균형을 파괴하여 중국과 가장 친했던 조선이 망국의 길을 걷는 단초를 제공했다.

만약 건륭제가 조부 강희제처럼 서양 문명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개방 정책을 폈다면 동아시아의 근대역사가 그처럼 비극으로 점철되지 않았을 것이다. 건륭제 시대의 청나라는 외형적으로는 황제와 신하 모두 자만에 빠질 정도로 국력이 막강했다.

하지만 유가의 보수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과학 기술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쇄국 정책을 폈기 때문에, 3억 인구 모두 눈뜬장님이 되어 서구 열강에게 처절하게 당한 것이다.

▣ 출처 :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

저자 : 강정만

출판 : 주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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