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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의 베개, 그 사랑의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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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

2019. 2. 26.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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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생 가운데 3분의 1을 차지하는 수면, 이 수면 시간을 사람과 함께 하는 베개는 이미 생활의 절대 필수품이 되었고, 인류의 역사, 문명과 함께 발전하여 지금 우리의 곁에 있다.

베개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 본능에 의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생활 도구였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재료나 형태의 베개를 사용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단순화되고 기능성이 강조되는 현대의 베개는 과거의 모습을 별로 남기고 있지 않는 듯하다.

중국 동한(東漢) 시대의 《변소주면도/邊韶昼眠圖》

* 변소라는 사람이 낮잠자는 모습을 그린 그림

중국은 넓은 땅과 긴 역사만큼 다양한 물건들이 존재하며, 배게 역시 그런 다양한 물건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면, 고대 중국에는 어떠한 베개가 존재하였을까?

중국에서 베개의 기원은 구석기 시대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당시 고대 인류는 돌이나 나무, 풀 묶음, 동물의 가죽이나 자신의 팔을 머리 밑에 고이고, 지금의 배게 역할을 하게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형태가 베개의 초기 형태이었을 것이다.

자주요(磁州窯)의 호두침 / 현대작

상(商)나라 시기, 완성된 베개가 처음으로 출현한다. 전해지는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상나라 시대에는 옥이나 돌로 만든 호두침(虎頭枕)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가장 이른 베개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호랑이가 씨족의 토템이나 수호신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호두침은 공예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호두침 / 현대 공예품

전국(戰國)시대~한(漢)나라

전국(戰國) 시대, 견직물의 생산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연질의 베개를 제작할 수 있는 재료가 공급된다. 전국 시대에서 서한(西漢)에 이르는 동안, 비단 베개가 출현하게 되고, 베개는 연질(부드러운 재질로 만든 베개)과 경질(돌이나 나무 베개 따위)의 두 종류로 나뉘게 된다.

한대(漢代) 류금(鎏金) 양옥(鑲玉) 동침(銅枕)

1957, 중국 하남성 신양(信陽)의 장태관(張台關)에 있는 전국시대 초()나라 묘에서 상태가 좋은 칠 나무 침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침상 위에는 대나무 베개가 있었다.

호북성 강릉시(江陵市)의 마산(馬山) 1호 초(楚)나라 묘(墓)에서 출토된 죽침(竹枕/대나무 베개)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베개의 실물은, 호북성 강릉시(江陵市)의 마산(馬山) 1호 초()나라 묘()에서 출토된 죽침(竹枕/대나무 베개)이다. 그리고, 호남성 장사(長沙) 마왕퇴 한묘(漢墓)에서는 비단 베개가 출토되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침枕은 누울 때 머리를 받쳐주는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나무 木"부에 배열하였다. 돌베개보다는 일반적으로 나무 베개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황갈색 견(絹)에 장수(長壽) 자수 장식이 있는 베개

한자로 베개는 /이라고 하고, 현대 중국에서는 전터우(枕頭)”라고 부른다. 그런데, “침두(枕頭)”라는 어휘를 삼국 시대 조조(曹操)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조조는 못하는 게 뭘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일단 그 이야기를 살펴본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앗! 조조가 베개까지?

어느 날, 조조는 군중의 막사에 등불을 밝히고 책을 읽는데, 밤이 깊어지자 매우 졸렸다. 곁에서 시중을 드는 서동(書童)이 침상에 올라 주무시도록 권하였다. 침상에는 병서가 들어 있는 몇 개의 서갑(書匣)이 놓여 있었는데, 서동은 그 서갑들을 침상의 머리 쪽으로 가지런히 한 줄로 쌓아서 조조가 누울 공간을 확보했다.

베개를 아주 높게 베고 진맥을 받는 조조 / 드라마의 한 장면

꽤나 졸렸던지 조조는 그냥 서갑 위에 머리를 둔 채 잠이 들었다. 서동은 딱딱한 서갑을 부드러운 천으로 말아서 조조에게 주었던 것이다. 다음날, 조조가 서동에게 이 물건의 이름이 무어냐?”라고 묻자, 서동은 그저 머리를 받치는 침구라고 대답했다. 조조는 곧 그 물건의 이름은 침두(枕頭/머리를 받치는 것)”라고 부르게 하였다.

당(唐)나라

수당(隋唐)시기에 이르러 나라가 융성해지면서, 청자(靑瓷)의 제작 기술도 상당 수준 성숙해졌다. 청자로 된 기명(器皿)들은 집집마다 사용되고, 자침(瓷枕)도 사람들이 애용하는 침구의 하나가 되었다. 사람들은, 자침이 피부와 정신을 맑고 깨끗하게 해주는 작용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자침에 산수화, 풍경화, 시구절 등 각종 우아한 주제를 넣어 제작하였으며, 자침은 예술성을 띠게 되었다.

밀현요(密縣窯)의 진주(珍珠) 바탕의 앵무문(鹦鹉纹) 베개 / 중국 당대(唐代)

중국 하남성 공의시(巩义市) 박물관

()나라 때의 베개는 대부분 장방형이었는데, 가운데가 들어간 요() 자 형태의 베개와 사다리 모양의 베개가 있었다. 당나라 후기로 접어들면서, 네모난 베개는 6각 형태로 변하였으며, 이후 사람의 수면에 편안한 원형 베개의 형태를 갖기 시작하였다.

송(宋)나라

송나라는 문()을 숭상하는 왕조였으며, 문인들과 사대부들은 유유자적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우아한 격조를 추구하는 가치관을 지향하였다. 이 시기에 "침부(枕賦/베개에 적어 넣은 글)"가 출현한 것도 송나라 통치자들이 문풍(文風)을 숭상했던 것과 직접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제작자는 266개의 글자를 가지고 도자침(陶瓷枕)의 생산지, 특징, 기능, 의미 등을 분명하게 묘사하였다.

백지흑화 침부 장방형침(白地黑花《枕賦》長方形枕) / 흰 바탕에 검정 꽃무늬와 침부(枕赋)가 적힌 장방형의 베개 / 길이 15.7cm 너비 42cm 높이 14.4cm / 제작자의 서명인 장빈일인(漳濱逸人)과 바닥부분에는 왕씨수명(王氏壽明)이라는 낙관이 있다.

자주요(磁州窯) 백유 흑채 자침(白釉 黑彩 瓷枕) / 중국 광동성 광주 서한 남월왕 박물관(廣州 西漢 南越王 博物馆)

북송(北宋) 시기의 유명한 역사학자 사마광(司马光)은, 작고 둥근 나무 베개를 사용하였는데, 잠을 자면서 조금만 움직여도 베개는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럴 때면, 사마광은 곧 잠에서 깨어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다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런 일로 인하여 그 베개는 "경침警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원목경침(圓木警枕/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함을 이르는 말)”이라는 성어가 생겨났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자침(瓷枕)의 출현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정감을 주었다. 투각(透刻) 기법으로 만들어진 송나라의 자침은 전통 조각 공예 기법을 베개에 응용한 실례이며, 베개에 입체감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송대의 부드러운 베개, 즉 연침(軟枕)은 대부분 자수로 장식하였으므로, “금루침(金縷枕)”이라고도 불렀다.

북송시대 정요(定窯) 해아침(孩兒枕) / 높이 19.3cm 길이 30cm 너비 11.8mm

아이 모양의 자침 / 중국 북경 고궁박물원

명(明) 나라

명나라 이후, 도자기로 만든 딱딱한 베개는 점차 쇠퇴하고, 직물로 만든 베개가 점차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 시기의 비단류 직물은 공예가 매우 정교하고 품질 역시 우수하였다. 또한 면(綿) 방직도 보편적인 수공업이 되었으며, 염색과 자수 등의 공예 또한 점점 숙련되어 갔다. 명대의 베개는 통상 원앙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원앙침 / 현대

명나라 이시진(李時珍/1518~1593)은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메밀 , 검은 콩, 녹두, 결명자 등으로 베개를 만들면 늙도록 눈이 밝다라고 하였다. 민간에서도 많은 종류의 베개들이 출현하였는데, 대부분 몸의 열을 낮춰 주는용도로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건강 기능성 베개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자수 베개 머리 / 중국 청대(淸代)

청(淸)~근대

베개의 변천은 헤어스타일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녀를 불문하고 옛사람들은 긴 두발은 묶음지어 늘 머리 위에 두었는데, 누울 때는 딱딱한 재질의 베개가 더 적합하였을 것이다.

석침, 죽침, 옥침, 목침, 도자침 등 딱딱한 재질의 베개는 두발에 통풍이 안되어 땀이 차는 현상이나 머리가 헝클어지는 현상을 줄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베개는 딱딱함에서 부드러움으로, 두발의 형태는 복잡함에서 간결함으로 변화한다.

명청 시기 이후에는 견직물 베개가 많아졌다. 이때에는 베개 중앙 부분의 크기가 커졌으며, 여러 가지의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한쪽을 비스듬하게 만들어 머리를 들고 기대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의자 등받이 위쪽의 머리 닿은 곳의 가로 막대 부분을 탑뇌搭腦라고 하는데, 이 부분을 베개처럼 크게 만들어 앉을 때 머리를 편하게 눕힐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자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제작/판매되고 있다.

명대의 돈후하고 화려한 문화가 청대에 이르러 섬세하고 정교한 문화로 변하게 되며, 사람들의 심미관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중하층의 사람들은 여전히 휘황찬란함을 사랑하였지만, 사회의 상류층과 문인들은 우아하고 참신한심미관으로 기울고 있었다.

자수 다자다복(多子多福) 문양 / 청대

다자다복(多子多福)이나 가족의 번성을 기원하는 백자(百子) 베개는 당시 많은 황실 귀족들이 선호했던 연침(軟枕/직물류로 만든 베개)이었다. 동시에, 청나라 때부터 차를 넣어 만든 다침(茶枕/차 베개)과 여러 가지 약재를 넣은 약침(藥枕)들이 유행하였다. 향기 나는 향초나 꽃잎 등을 넣은 베개도 출현하여 머리맡에서 향기가 나거나, 수면을 돕는 역할을 하게 하였다.

백자(百子) 자수 베개 / 현대작

근대에 이르러, 서양 문물이 물밀 듯 들어오게 되자, 서양식의 얇고 납작한 베개가 중국에 전해졌다, 1940년대, 베개의 양식과 장식은 서양 스타일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중국 전통의 화훼, 산수, 인물 등의 장식이 쓰이고 있다.


베갯 속의 역사 - “육합태침(六合泰枕)”

핑야오 고성

세계 문화 유산의 하나인 핑야오(平遥) 고성(古城)에는 육합태침(六合泰枕)”이라는 유명한 베개가 있다. 이름도 여러 가지인데, 천지(天地)와 동남서북(東南西北)을 상징한다는 육공침(六孔枕/여섯 개의 구멍이 있음), 공부자침(孔夫子枕), 동전을 닮았다고 해서 전폐침(錢幣枕)이라고도 부른다.

핑야오(평요/平遥) 고성(古城) / 중국 산서성 진중시(晉中市) 평요현 / 세계 문화 유산 / 중국 5A급 풍경구

이 베개에는 자희태후(서태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864, 자희태후가 핑야오(평요)고성으로 행차를 하게 되는데, 당시 청나라는 외우내환으로 근심이 많았다. 자희태후는 이 걱정, 저 근심으로 편치 않은 마음에 행차에 나서기는 했지만, 가는 길마저 울퉁불퉁이라....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를 알아차린 핑야오의 관리들이 육합태침(六合泰枕)”을 갖다 바치자, 자희태후가 비로소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육합태침(六合泰枕)

다음 날, 자희태후는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서, 베개를 왜 육합(六合)이라 하는지 물었다. 한 관리가 여섯 개의 구멍은 천하, 동서남북을 대표하며, 천하태평의 뜻을 담고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자희태후는 크게 기뻐하여 천하태평, 국태민안이라고 하며, 이름에 를 더하여 육합태침(六合泰枕)”으로 명명하였다.


베개와 (고사)성어

* 풀이는 네이버 사전을 참고하였음.

안침이와(安枕而卧) 베개를 놓고 편안히 잠을 자다. 아무런 걱정이(염려가) 없다.

고침무우(高枕無憂) 베개를 높이 하고 걱정 없이 잘 자다.

만강열침(滿腔熱枕) 마음 속에 열렬하고 진지한 마음이 가득하다.

수화침두(繡花枕頭) 를 담은 수놓은 베개.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형편없는 베개. 보기에 그럴듯하지만, 실속이 없는 사람.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실제로는 재능과 학식이 없는 사람. 빛 좋은 개살구.

원목경침(圓木警枕)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함을 이르는 말.

사마광(司馬光)의 원목경침(圓木警枕)

침과대단(枕戈待旦) 창을 베고 아침을 기다리다; 늘 적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싸울 태세를 갖추다.

곡갱이침(曲肱而枕) 팔을 구부려 베개로 삼다; 걱정 근심이 없는 편안한 생활을 형용함(<논어/술이편>에서 유래함)

선침온석(扇枕温席) 지극 정성과 효성으로 부모를 모심을 비유함. 선침온금(扇枕温衾), 선침온피(扇枕温被)라고도 함.

선침온석(扇枕温席)

일침황량(一枕黄粱) 꿈처럼 덧없는 부귀공명. 허황된 일. 허무한 꿈. 황량몽(黄粱夢)이라고도 함. <침중기/枕中記>에서 유래함.

일침남가(一枕南柯) 꿈처럼 덧없는 부귀공명. 허황된 일. 허무한 꿈. <南柯太守傳>에서 유래함.

침중홍보(枕中鸿宝) 베갯 속의 보물; 아주 진귀한 책을 비유함. <한서·유향전>에서 유래함.


베개와 Love Story

베개는 중국 문학에서 흔히 “애정”과 “부부”의 대명사로 쓰인다. 동침(同枕/같은 베개를 베다)은 동침(同寢)이다. 좋은 배게는 좋은 사람을 만들고, 좋은 사람은 좋은 연인이 되고 좋은 부부가 된다는 것이다.

중국 문학 작품과 역사에 나오는 사랑과 베개의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한다.

■ 1화-복비류침宓妃留枕/복비가 베개를 남기다

《소명문선/昭明文選》에 따르면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조의 셋째 아들인 위동아왕(魏東阿王) 조식(曹植/192~232졸)은 견복(甄宓/183~221졸)을 자신의 부인으로 해 줄 것을 바랐으나, 아버지 조조는 이를 무시하고 견복을 자신의 둘째 아들인 조비(曹丕/187~226)와 짝을 이루게 하였다. 훗날, 견복(위문소견황후/魏文昭甄皇后)이 참언으로 죽음을 받게 되자, 조비는 견복의 유물인 옥대금루침(玉带金鏤枕 또는 영롱침/玲瓏枕)을 조식에 주었다.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제작된 차이사오펀(蔡少芬) 주연의 <낙신(洛神)>22부작(2002/홍콩)

조식이 도읍을 떠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낙수(洛水)를 지나는데, 꿈에 견복(견후/甄后 또는 견희甄姬)가 나타나 “나의 마음은 당신에게 있었지만, 그 마음이 다다르지 못하였습니다. 이 베개는 제가 시집오면서 집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전에는 오관중랑장(전 남편 조비)에게 드렸지만, 이제는 당신에게 드립니다”라고 했다. 이른바 “복비류침宓妃留枕/fú fēi liú zhěn/복비가 베개를 남기다”라는 고사이다.

* 다른 기록에는 “복비(宓妃)는 복희(伏羲)딸로서 낙수(洛水)에 빠져 죽어 낙수의 신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 《소명문선/昭明文選》은 남조(南朝)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태자인 소통(蕭統/501~531)이 526~531년에 여러 문인들과 공통으로 작품을 골라 편찬한 문학 작품집. 소명(昭明)은 소통의 시호(諡號)이다.


■ 2화-당나라 고양공주의 금보신침(金宝神枕) 분실 사건

당나라 태종 때, 현장법사를 도와 불경을 번역하면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편찬한 변기(辯機/619~649/지금의 절강성 금화金華 출신)화상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당 태종의 딸이자, 당대의 명신 방현령房玄齡의 아들인 방유애房遺愛의 부인인 고양(高陽/?~653) 공주와 사통하게 된다.

드라마 《고양공주高阳公主》의 한 장면

당시, 궁 안에서 고양공주의 금보신침(金宝神枕) 분실 사건이 발생한다. 어사정(御史庭)에서 금보신침 베개 도난 사건을 조사하면서 결국 고양공주와 변기 화상의 사통은 들통 나게 된다. 고양공주가 변기화상에게 사랑의 선물로 준 것이었다.

당 태종은 크게 노하여 변기 화상을 요참(腰斬/허리를 자르는 형벌)형에 처하였고, 노비 10여 명도 처형되었다. 이일은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资治通鑒》등에 기록되어 있다. * 1998년에는 후계림(侯继林)이 주연한《고양공주高阳公主》라는 이름의 드라마가 제작되었다.

드라마 <무미랑전기/武媚娘传奇> 장면

이밖에, 원대(元代) 왕실보(王实甫/1260~1336)가 쓴 잡극(雜劇) 《서상기/西厢記》에는 최앵앵(崔莺莺)이 2인용 원앙침(鴛鴦枕)을 들고나가 장생(張生)과 유회(幽會=밀회(密會)를 즐긴다는 대목이 나온다.

<서상기>의 최앵앵과 장생의 유회(幽會)를 그린 접시 / 중국 경덕진 작품

베개는 사람의 신체와 가장 밀접하게 접촉하는 매우 사적(私的)이고 개인적인 생활 도구이다. 특히, 감정과 사고(思考)를 관장하는 머리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움의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는 베개에 머리를 파묻기도 하고 껴안기도 한다.

취침하는 모습.... / 드라마의 한 장면

베개 가운데 원앙침은 부부의 애정을 상징하며, 이러한 관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중국의 옛 여인들은 자신의 신체와 가장 많은 접촉했을.... 그것도 애정의 상징인 원앙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표시로 주기도 했으며, 밀회 때에는 자신의 손에 직접 원앙침을 들고 나가기도 했다. 이렇듯 베개가 주는 애정의 의미는 자신의 생명만큼 소중했다고 할 수 있다.

*베개에서는 머리가 닿은 이 “탑뇌” 부분을 “침두(枕頭/베개와 머리가 닿는 부분)”라고 하였는데, 현대 중국어의 베개(전터우/枕頭)라는 어휘는 여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중국 지역 방언에 따라서 베개를 부르는 어휘 역시 큰 차이는 없다. 예를 들면, 떠우쩐(豆枕), 뚜쩐(都镇), 떠우젠(斗肩), 떠우진(豆劲) 등이 있다.


도자침(陶瓷枕) 걸작선

ⓒ 중국 광동성 광주 서한 남월왕 박물관(廣州 西漢 南越王 博物馆)

* 목재류, 직물류의 베개들은 보존성이 약하여 유물로 출토되는 일이 매우 드물다. 따라서 박물관에서도 대량으로 소장하기 어려운 문물이다. 반면, 단단한 재질의 베개는 보존성이 양호하여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어린 아이를 그린 자침 / 중국 북송(北宋) 하북(河北) 정요(定窯)

녹유(綠釉) 타원형 토끼모양 받침 좌침(座枕) / 중국 당대(唐代) 후기 하남(河南) 공현요(巩县窑)

흰 바탕에 뛰는 양을 그린 원보(元寶)형 도자침

갈색유 바탕에 꽃 문양을 그린 자침 / 중국 당나라 후기 안휘(安徽) 수주요(壽州窯)

<논어/위령공편>제24장에 나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자침 / 중국 금대(金代) 하북 자주요(磁州窑)

청백유(靑白釉)에 연꽃 문양을 그린 자침 / 중국 원대(元代) 강서(江西) 경덕진(景德鎭)

흰 바탕에 갈색유로 화훼와 시문(詩文)을 그린 자침 / 중국 남송(南宋) 강서 길주요(吉州窯)

녹황유에 시문을 새긴 부채형 자침 / 중국 금대(金代) 하북 자주요

삼채(三彩) 시문 육각형 자침 / 중국 금대(12~13세기) 산서(山西) 진남(晋南)

갈색 바탕에 흰 꽃과 동전 문양을 그린 해당화형 자침 / 중국 북송 자주요(磁州窑)

흰 바탕에 갈색으로 부채를 부치는 아이를 그린 팔각형 자침 / 중국 북송 자주요(磁州窑)

동전문양을 새긴 녹유 자침 / 중국 금대(金代) 하남요(河南窯)

흰 바탕에 연꽃과 물고기를 그린 꽃 모양의 자침 / 중국 금~원대 산서 개휴요(介休窑=홍산요 洪山窑)

삼채 연화문 금전문 자침 / 중국 청대 초기

흰 바탕에 흑유(黑釉)로 까마귀를 그려 넣은 나뭇잎 모양 자침 / 중국 북송 당양욕요(當陽峪窯/현재 하남성 焦作市)

검은 바탕에 삼채로 "진관봉후晋官封侯”문양을 그린 자침 / 중국 금대(金代) 산서 진남요(晉南窯)

호랑이와 목단 문양을 그린 삼채 장방형 도침(陶枕) / 중국 금대

사면에 춘하추동을 그린 분채(粉彩) 방형 자침 / 중화민국 시대(1911~1949)

중국 북송시대의 문인 왕수(汪洙/?~?)의 시 구절 "뜰에는 봉황죽을 심고, 못에는 잉어를 기르다(庭栽栖鳳竹,池養化龍魚)"라는 시문을 새긴 강황유(薑黄釉) 자침 / 중국 원대(元代) 평양요(平陽窯)

백유(白釉) 목단문 둥근 자침 / 중국 금대

쌍사자 받침이 있는 황유 자침 / 중국 금대


중국 광주(광저우) 서한 남월왕 박물관

관련포스팅

https://blog.naver.com/cytchoi/221699712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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