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역사/清宫秘史

청나라의 공주格格는 아이를 안 낳았나, 못 낳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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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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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後金) 때에는, 국군(国君), 대한(大汗)과 패륵(貝勒)의 딸, 또는 결혼하지 않은 부녀자를 모두 “격격(格格)”이라고 불렀는데, 이때는 정해진 규정이 없었다. 

누르하치

예를 들면, 청 태조 누르하치의 장녀를 “동과 격격(東果 格格)”으로, 차녀를 “눈철 격격(嫩哲 格格)”이라 불렀다.

청 태종(太宗) 황태극(皇太極/1592~1643)은 숭덕(崇德) 원년(1636년)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황제의 딸을 “공주(公主)”라고 부르도록 하였으며, 황후가 낳은 딸은 “고륜 공주(固倫 公主)”로, 비(妃)가 낳은 딸과 황후의 양녀(養女)는 “화석 공주(和碩 公主)”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이후, “격격(格格)”은 왕공 귀족의 딸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순치제

순치(順治) 17년(1660년)에는 “격격(格格)”을 5등급으로 나누게 된다.

 

▪친왕(親王)의 딸은 “화석 격격(和碩 格格)”으로 봉하고, 적(嫡) 복진(福晉)이 낳은 딸은 군주(君主), 측실(側室) 복진이 낳은 딸은 군군(郡君)이라 한다.

 

▪세자(世子)와 군왕(郡王)의 딸은 “다라 격격(多羅 格格)”으로 봉하고, 적(嫡) 복진(福晉)이 낳은 딸은 현주(縣主), 측실(側室)복진이 낳은 딸은 현군(縣君)이라 한다.

 

▪다라 패륵(多羅 貝勒)의 딸도 “다라 격격(多羅 格格)”으로 봉하고, 적(嫡) 복진(福晉)이 낳은 딸은 군주(君主), 측실(側室) 복진이 낳은 딸은 향군(鄕君)이라 한다.

 

▪고산 패자(固山 貝子)의 딸은, 적(嫡) 복진(福晉)이 낳은 경우 “고산 격격(固山 格格)”에 봉하고 현군(縣君)이라 하며, 측실(側室) 복진이 낳은 경우에는 봉하지 않고 종녀(宗女)라고 부른다.

 

▪진국공(鎭國公) 또는 보국공(輔國公)의 딸은, 적(嫡) 복진(福晉)이 낳은 경우에는 향군(鄕君), 측실(側室) 복진이 낳은 경우 봉하지 않고 종녀(宗女)라고 부른다.

복진(fujin/福晋)은 황태자, 친왕, 세자, 군왕의 처를 지칭하는데, 한어의 "비/妃"에 해당하는 만주어의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말이다. "격격(gege/格格)" 역시 만주어의 "그어그어~ㄹ"라는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밖에, “공(公)”이하의 딸은 종녀(宗女)라고 부르지만, “격격”이라는 호칭은 정식 봉호가 없는 귀족의 부인이나 지위가 높은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칭호는 청나라 말기~민국 초기까지 사용되었으나 이후 점점 사라지게 된다.


청나라 격격(格格/공주)들은 매우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는데, 그들의 출가 연령을 보면, 10~13세가 18명, 14~18세가 21명, 19세 이상은 6명, 2명은 출가 이전에 병으로 죽었다. 출가 연령이 가장 어린 공주는 누르하치의 장녀로서 겨우 10세였다.

청나라 역사를 보면, 이렇게 어린 격격(格格)의 부부는 대부분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았고, 그들 사이에는 아이도 없었다. 황실의 격격(格格)은 아이를 낳지 못하였던 것일까, 아니면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 원인은 부마와 격격(格格)의 신분상의 관계에 있다. 청나라 황실의 규정에 따라, 격격(格格)이 출가하게 되면 황제는 저택을 하사하게 되는데, 격격(格格)과 부마는 신혼 후에도 반드시 궁중의 규정을 엄수하여야 했다. 

일반적으로, 격격(格格)들은 자신의 저택의 내원(內院)에서 살았고, 부마는 외원(外院)에서 살았으므로, 밤을 함께 보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각방에서 따로 잠을 자야했다. 밤에 몰래 만나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게 되지는 않다.

 

격격(格格)과 부마의 사이에는 물리적인 담장 외에도 또 이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격격(格格)의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와 출가한 격격(格格)을 관리하는 보모이다. 

이들은 격격(格格)의 저택을 관리하고 격격(格格)을 돌보는 일을 하였지만, 그들의 권한은 격격(格格)의 권한보다 컸다. 이러한 사람들이 격격(格格)과 부마 사이에 존재했던 것이다. 

청나라 황실이 이러한 제도를 유지한 것은 황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며, 황실의 격격(格格)들은 이것에 대하여 감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부마의 입장에서도 공주(또는 格格)의 허락이 없으면,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것은 격격(格格)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격격(格格)에게도 불편한 일이었다. 

 

공주(또는 格格)는 황제의 딸이었지만, 어린 공주가 먼저 나서서 부마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당시 예법과 규정에서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수치심도 모르는 여자라는 말이 나올까 몹시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격격(格格)과 부마가 아이를 갖는 것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평소에도 격격(格格)과 부마는 직접 만나기가 어려운데다, 부마는 일반적으로 일을 부여받고 그 일을 하는데 분주하게 된다. 격격(格格)은 두 번째 부마를 맞아들일 수 없지만, 부마는 이와 달리 측실(側室)을 들일 수 있었다. 부마는 첩을 맞아들여 아이를 가질 수 있었지만, 격격(格格)은 아이를 가져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무수히 많은 황실 규정에 습관이 된 격격(格格)은 이러한 불합리한 규정을 운명으로 받아 들이고,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스스로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많은 격격(格格)들은 현실의 삶 속에서 병이 나게 되며, 대부분 세상을 일찍 떠나게 된다. 황제의 딸인 격격(格格)도 삼엄한 규범 속에서 대부분 후손을 가지지 못했고, 만약 공주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부마는 공주 저택에서 나와야 했다.

 

청나라 최고의 탐관(貪官) 화신(和珅/1750~1799)의 아들 풍신은덕(豊紳绅殷德)은 건륭 황제의 딸 고륜 화효 공주(固倫 和孝 公主/1775~1823)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 아이는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후에는 다시 아이를 낳지 않았다. 

비록 황제의 딸이었지만 황실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속박 속에 살았던 것이다.


《청사고/清史稿·공주표公主表》의 기록에 따르면, 청나라 순치(順治) 이후 7명의 황제(동치제, 광서제, 마지막 선통제 부의는 후손이 없음)까지, 격격(格格)으로 봉해진 여성은 31명이었다. 

이들 중 50세 이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은 24명으로 전체의 77%를 차지하고 있다. 20세 미만에 세상을 떠난 격격(格格)은 2명, 20~29세에 세상을 떠난 이는 13명, 30~39세에는 4명이 세상을 떠났고, 40~49세 사이에는 5명이 세상을 떠났다.


일반 백성들은, 공주들은 황실의 좋은 환경에서 잘 먹고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주들의 수명은 생각보다 짧고, 대부분 후손도 없었다. 혼인은 하였지만, 일반인과 같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 자란 꽃이 빨리 시드는 것처럼, 화려해 보이는 청나라 격격(格格/공주)들의 현실은 우울함과 억눌림 속에서 수명을 단축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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